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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2020-3호] 이일영 장비회원 인터뷰

2020-08-13
조회수 702

이일영님 인터뷰 사진.png

 

이일영 장비회원 인터뷰

 

기록, 정리 :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비 편집위원


Q. 독자 여러분께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재활의학과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10년 전에 현업에서 은퇴했다. 의대 재학 중이던 60년대 당시에는 재활의학이 없었다. 재활의학 훈련을 받으려면,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재활의학의 꿈을 안고, 3년의 병역을 마친 뒤 도미하여 전공 공부를 시작했다.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었다. 이후 귀국하려 했으나, 한국에서의 적응에 확신이 없었다. 뉴욕대와 하버드대학교 척수 손상센터에서 각 1년씩 펠로우를 한 뒤, 하버드대학교에서 계속 의사로 일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녀들이 자라고, 정신과 의사인 아내와 함께 생계를 꾸리며 보스턴에 집을 구해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게 된 계기는 블루베리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느 날, 시장에 들러 블루베리를 사 와서 먹었는데, 다음날 시커먼 변을 보게 되었다. 스스로 추측하기를 암으로 유추되는 혈변을 보고 나자, 머리를 꽝 맞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을 떠날 때의 초심이 떠올랐다. 한국에 가서 재활의학을 하겠다고 왔는데 미국에서 안락하게 자리 잡은 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사실 암이 아니라, 전날 먹은 블루베리 때문에 변색이 그렇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때의 충격이 내 삶을 바꾸어 사회를 위한 장애인 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했다.

 

Q. 재활의학과 의사로서의 삶은 어땠는가?

 

(암 투병을 연상케 했던) 블루베리 사건 이후 1984년에 귀국하여 연세대 재활의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11년간의 도미 생활을 그렇게 마감했다. 연세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여러 사건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욕창의 성행이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그 당시 대학병원에서 척수손상 환자의 체위 변경에 무심했던 한국의 의료환경에 욕창 예방을 위한 강의 등을 진행했었다. 그런데도 환자들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직접 뛰며 병원 내 욕창 발생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 와중에 연세대 총장 엉덩이에도 욕창이 발생하는 불상사가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욕창을 단기간에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병원장에게 말했고, 주변 의료진이 모두 나의 말에 무례하다며 화를 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욕창에 대한 수술비/의료비 책임은 환자/보호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의료진은 무관심했으며, 턱없이 부족한 보건의료 인원으로 인해 욕창 예방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열악한 현실을 깨달았다.

 

하루는 척수손상 전문의인 자신에게 외래 환자가 잘 오질 않자, 왜 병원에 오지 않을까 고민했다. 어느 날 외래 환자 대신 환자 보호자가 대신 와서 말하기를, 자기 자녀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동행인이 필요하고, 택시 탑승까지 거부당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장애인 자녀를 병원에 데려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치료는 고사하고 근본적으로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직접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구애련 선교사가 barrier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면서, 서울-인천 내 척수손상 환자의 리스트를 수집했다. 이 자료를 토대로 약 80명의 환자에 대해 방문 진료를 시작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나의 왕진을 극히 싫어했다. 일각에서는 나에 대한 악성 소문과 인신공격까지 벌였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병원 측과 마지막 면담을 진행하고 사표를 쓰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지금의 한국에는 아무리 실력 있는 의사가 있어도 소용없다.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미국에 계신 홍근수 목사님께 찾아가서 이야기했고, 사회 변화를 꿈꾸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주화운동에 뜻을 모아 뉴잉글랜드 목요 기도회를 열어, 당시 독재정권이었던 전두환 대통령 퇴진 등을 외치는 기도회를 전개했다. 미국 한인 사회에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주화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통일의 문제가 얽혀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 함께 통일 운동을 함께 전개하게 되었다.

 

Q. 민주화운동, 통일운동가로서의 삶은 어땠는가?

 

홍근수 목사님이 한국으로 돌아가 민주화운동 등을 전개하는 동안 나는 홍근수 목사님의 빈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당시 518 광주 운동 주역인 윤한봉(밀항)이 청년운동을 시작하여 미국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만들었고, 나도 이 운동에 함께 합류하게 되었다. 86년쯤 통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이해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찰나, 중국 개방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시기에 북한에 인접한 동북 3성에 방문하여, 3주간 현장답사를 했다. 그 무렵 백두산에 처음 올라갔을 때, 북한과 경계가 없음을 알았다. 특히 나의 고향 황해도 해주를 생각했을 때, 더욱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이때부터 통일 운동 이상의 고향에 대한 열망이 시작되었다. 당시 영어 선교 공부를 하던 기독교인 부친의 북한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일 운동을 시작했다.

 

나의 통일 운동은 북한 내 병원 설립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재활의학과 의사이던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재활센터를 만드는 것이었으며, 특히 내 고향 해주에 재활센터를 만들고 싶었다. 근래의 나는 평양 의학 과학 토론회에 몇 차례 강의하면서, 재활에 대한 이야기/UN CRPD 등을 강의한 바 있다. 이윽고 2014년 UN CRPD(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북한이 서명하고, 2016년에는 비준하기에 이르렀다. 2018년에는 UN 장애인 위원이었던 김형식 교수와 북한에 들어가서 CRPD 평가를 진행하며 북한의 장애 인권에 대한 정책 평가 등을 수행했다.

 

Q. 벽돌회원 이일영이 생각하는 장애운동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쩌면 장애인의 의료 문제는 쉬운데, 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의식 변화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특히 사람을 가치 있게 생각할 수 있는 환경조성,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최중증 장애인을 중심으로 사회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성숙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Leave no one. behind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의 실천이다. 장애인의 의료적 재활은 그 일부일 뿐,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변혁이다.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운동의 큰바위얼굴(great stone face)이다. 이들 단체는 그 자체로 정말 중요하다. 비록 이들 스스로는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장애운동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도맡고 있다. 장애 인권에 있어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이 단체의 중요성을 모두가 알아야만 한다. 특히 장애인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다. 당사자 운동으로 시작된 장애인 운동의 힘과 역동성을 알아야 한다. 장애운동은 단지 책만으로 또는 이론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언제나 현장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현장에서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태도이다. 현장의 노력이 체계화될 때 학문의 체계도 잡힐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활동가 스스로가 본인이 시작한 일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소위 재활을 포함해서 장애인 문제 전체를 놓고 볼 때, 지금 하는 그 일이야말로 이 사회를 바꾸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일이므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장애인 운동이 지속할 수 있는 추진력을 토대로 우리는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장애인 운동 활성화는 전체 사회의 열망(compassion)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당사자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열망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이 장애운동의 기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꺼지지 않는 불을 위한 진실성(integrity), 첫 열정이 식지 않고 계속 가는 것, 끝으로 꿈(dream)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끊임없이 추진해야 하며, 가장 아래에는 Leave no one behind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 힘을 토대로 국가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기쁘다. 엘리베이터 오셨네’ (동대문역사역 엘리베이터)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투쟁해서 만들어낸 것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Q. 벽돌회원 이일영이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활동이란?

 

활동가에게 중요한 것은 소진(burn out)되지 않는 것이다. 운동가들이 재충전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과거 ‘인권재단 사람’의 이사장직을 하면서, 인권운동가에게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을 염두 했다. 활동가와 장애인 당사자들은 쉽게 그 가족까지 소진되고 마는데, 활동가의 돌봄(caring of care-giver)의 시스템을 많이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야 할 길은 지금의 운동가들을 번-아웃되지 않게 하라. 운동가들이 계속 꺼지지 않는 불이 될 수 있도록 연구해야 한다. 국가를 끌어들여서라도 말이다.

 

벽돌회원 후원에 있어 별도의 각오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후원하는 것은 응당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진 돈을 마냥 쌓아놓을 필요가 없다. 활동도 마찬가지다. 내가 의사직에서 일찍 은퇴한 이유도 여전히 활동 가능하다는 모습(I am available)을 보여주고 나누기 위해서였다.

 

끊임없이 활동하다 보면 어떤 운동가들은 자신이 운동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뜻이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해야 한다. 운동이 일상이 되고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Q. 활동가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누구나 인생을 설계할 때, 무엇을 인생의 핵심적인 가치냐를 꼭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이 돈을 생각하고 돈에 끌려다니지만, 사실 사회가 돈의 가치를 세뇌하고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와 신뢰, 믿음, 나눌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삶이다. 삶을 택할 때 가장 가치 있고 중요한 게 무엇인지 계속 묻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자기 인생에 후회 없는 길이다. 속세를 쫓아가는 삶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음을 늘 알아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검은색 차와 운전기사에 기대는 삶은 결국 타락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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