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소개
정창조(노동권위원회 간사)
#팔 수 있는 몸, 팔 수 없는 몸
비장애인 남성인데다가 딱히 출세할 욕심도 없는 나는 살아오는 내내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음을 자신해왔다. 뭐가 더 필요해? 몸뚱아리만 있으면 되지. 저임금에 불안정하고 위험할지라도, 어쨌거나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내 몸을 어디엔가 팔 수가 있었다. 어쩌면 내 몸에는 일종의 자부심이 스며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놈은 민폐 안끼치고 알아서 먹고 사네’라는 평판 정도는 듣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부심. 기껏해야, 나는 지금껏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왔고, 앞으로도 해방 세상을 선도해 갈 노동 계급이라는 자부심. 그러나 이 대단치 않은 자부심조차 누군가에겐 불가능한 상상일 뿐임을 깨닫는 데는 단 한 장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017년 겨울, 장애인고용공단에 돌연 성난 장애인 무리가 나타났다. 전동휠체어 몇 대가 남산스퀘어 빌딩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섰고, 어떤 이들은 진입을 막아선 경찰벽 틈으로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그 사이, 벽 곳곳에는 온갖 함성들이 나붙고 있었다. “나도 노동자다!”, “나도 직접 돈을 벌어 가족들, 친구들한테 밥도 사보고 싶다!”, “나도 노조 활동을 해보고 싶다!” ‘최저임금적용제외조항 폐지’, ‘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개 쟁취’, ‘장애인고용공단 개혁’이라는 무거운 구호들 사이로 들어선 이 삐뚤빼뚤 한 아우성들은 낯설다 못해 기이했다. 아무리봐도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어느 누구도 고용하길 원치 않을 것 같은 이 ‘비정상’ 신체들의 외침은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전장연 노동권위원회는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이 질문에서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출범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이유로 이 위원회의 간사직을 수락했다.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몸들’은 ‘자발적 착취를 기꺼이 감내해 온 노동력 상품인 내 몸’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더 나아가 누구도 착취받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전장연은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가?
#내 몸이 아니라, 노동환경을, 사회적 관계를 먼저 바꾸기 위하여
기존 장애인 노동 정책은 대부분 장애인 개인들에게 우선 노동 시장에서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될 것을 요구해 왔다. 당신은 현재 도무지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일할 수 있는 몸으로 먼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재활’의 요구는 비정상으로 규정된 장애인의 ‘현 상태’를 결코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노동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장애인 개개인들의 책임인 양 말하면서 말이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지 마라! 그 노력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적어도 선량한 이들 몇몇 쯤은 그 숭고한 노력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계속해서 가난에 시달릴 지라도, 노동 현장이 생산현장이 아니라 수용시설 마냥 당신들의 ‘보호 기관’으로 전락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그 따위’ 몸으로 노력하는 당신의 모습은 어쨌건 아름다우니까.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억압을 강화하고, 차별을 공고화할 뿐이다. 이는 이미 과거의 역사가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장애 해방의 역사는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장애인들이 어떠한 기본적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증명해온 과정이었다.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고 나서야 학교에 갈 수가 있었고, 봄 소풍도 갈 수 있었으며, 친구도 사귈 수 있었고, 그 흔한 노래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 이슈도 마찬가지다. 중증장애인들이 현재의 기준에 맟춰 노동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로 ‘중증장애인=기생적 존재’라는 낙인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하다못해 얼마나 장애인 개개인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지금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나서야 하는 투쟁은 다른 권리쟁취 투쟁에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시도해 왔던 것처럼 장애인 당사자 자신의 몸이 아니라, 현재의 노동을 둘러싼 관계망을 전면적으로 바꿔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 개념은 변한다. 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고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인간 욕구의 확장에 따라, 노동이 아닌 것이 노동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출현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그동안 장애인을 노동 바깥으로 내몰아 왔지만, 그러므로 세계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왔지만,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노동 양식, 즉 임금 노동이 결코 노동의 유일한 양식일리는 없다. 그리고 마침 자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자들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통해 연명하고 있는 현재의 노동 개념을 깨뜨려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전장연 노동권위원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진보적 장애인 운동 차원에서 기존의 노동 환경, 특히 장애인들을 노동 바깥으로 내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임금 노동 체계 전반에 대한 저항의 실천들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데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 물론 노동권위원회가 논의한 사안은 전장연 사무총국과 중앙운영위원회 등의 승인을 거칠 때만이 전장연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 현재 장애 관련 이슈 전반에 주목하느라, 각 장애 관련 이슈들 하나하나에 주목할 수 없는 사무처에게 이 위원회는 장애인 노동과 관련된 여러 투쟁 의제들을 발굴하여 제시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실질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민하며, 사회적으로 담론화해 가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설립된 지 약 반 년의 기간 동안, 노동권위원회는
1.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 개념 확립을 위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개념 정립, 더 나아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안정화 및 확장 투쟁
2. 정립전자 불법사업 및 노동자 해고 규탄 투쟁
3. 공공기관 의무고용률 미준수 규탄 투쟁
4.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에 기반한, 그러므로 곧 비장애인을 노동 시장에서 배제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을 넘어서기 위한 민주노총과의 고동 투쟁 전선 건설 등을 추진 등의 과업을 수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위원회는 각종 기자회견을 꾸리고, 토론회 등을 개최 및 참가하는 한편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노동 운동 진영이 주목하고 있는 현안에도 적극 연대해 왔다.
#장비 회원들의 지지와 동참을 요청하며
노동권위원회를 꾸리고 가장 많이 들은 핀잔이 있다. 더 나은 복지 시스템을 마련하고 인권 의식을 사회적으로 더 확산시키면 되지, 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역량을 굳이 노동 문제에 투여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인 조상지 동지가 이미 말한 바 있듯, 장애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이라는 활동은 타인들과 함께 세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이로써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며, 따라서 자신과 사회를 하나하나 변화시켜 가는 활동이다. 여태껏 그 활동으로부터 배제되어 온 이들을 계속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남겨두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그러한 세상을 과연 해방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러한 세상을 용인하는 것은 과연 전장연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장애인 노동권 투쟁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삶의 조건을 바꿔내는 동시에, 현재의 억압적 생산 양식 전반에 대한 변혁 운동이 될 것이다. 새로운 노동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이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기 위해, 노동시장으로부터 제일 먼저 배제되어 온 장애인들이, 그리고 전장연의 모든 동지들이 ‘먼저’ 투쟁에 나서야 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동권위원회 소개
정창조(노동권위원회 간사)
#팔 수 있는 몸, 팔 수 없는 몸
비장애인 남성인데다가 딱히 출세할 욕심도 없는 나는 살아오는 내내 스스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음을 자신해왔다. 뭐가 더 필요해? 몸뚱아리만 있으면 되지. 저임금에 불안정하고 위험할지라도, 어쨌거나 나는 원하기만 한다면 내 몸을 어디엔가 팔 수가 있었다. 어쩌면 내 몸에는 일종의 자부심이 스며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놈은 민폐 안끼치고 알아서 먹고 사네’라는 평판 정도는 듣고 살아갈 수 있다는 자부심. 기껏해야, 나는 지금껏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해왔고, 앞으로도 해방 세상을 선도해 갈 노동 계급이라는 자부심. 그러나 이 대단치 않은 자부심조차 누군가에겐 불가능한 상상일 뿐임을 깨닫는 데는 단 한 장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017년 겨울, 장애인고용공단에 돌연 성난 장애인 무리가 나타났다. 전동휠체어 몇 대가 남산스퀘어 빌딩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섰고, 어떤 이들은 진입을 막아선 경찰벽 틈으로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그 사이, 벽 곳곳에는 온갖 함성들이 나붙고 있었다. “나도 노동자다!”, “나도 직접 돈을 벌어 가족들, 친구들한테 밥도 사보고 싶다!”, “나도 노조 활동을 해보고 싶다!” ‘최저임금적용제외조항 폐지’, ‘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개 쟁취’, ‘장애인고용공단 개혁’이라는 무거운 구호들 사이로 들어선 이 삐뚤빼뚤 한 아우성들은 낯설다 못해 기이했다. 아무리봐도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어느 누구도 고용하길 원치 않을 것 같은 이 ‘비정상’ 신체들의 외침은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전장연 노동권위원회는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이 질문에서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 출범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이유로 이 위원회의 간사직을 수락했다. ‘착취당할 자격조차 없는 몸들’은 ‘자발적 착취를 기꺼이 감내해 온 노동력 상품인 내 몸’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더 나아가 누구도 착취받지 않는 노동을 위하여, 전장연은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가?
#내 몸이 아니라, 노동환경을, 사회적 관계를 먼저 바꾸기 위하여
기존 장애인 노동 정책은 대부분 장애인 개인들에게 우선 노동 시장에서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될 것을 요구해 왔다. 당신은 현재 도무지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일할 수 있는 몸으로 먼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재활’의 요구는 비정상으로 규정된 장애인의 ‘현 상태’를 결코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노동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장애인 개개인들의 책임인 양 말하면서 말이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지 마라! 그 노력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적어도 선량한 이들 몇몇 쯤은 그 숭고한 노력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계속해서 가난에 시달릴 지라도, 노동 현장이 생산현장이 아니라 수용시설 마냥 당신들의 ‘보호 기관’으로 전락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그 따위’ 몸으로 노력하는 당신의 모습은 어쨌건 아름다우니까.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억압을 강화하고, 차별을 공고화할 뿐이다. 이는 이미 과거의 역사가 증명해 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장애 해방의 역사는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장애인들이 어떠한 기본적 권리도 보장받을 수 없음을 증명해온 과정이었다.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고 나서야 학교에 갈 수가 있었고, 봄 소풍도 갈 수 있었으며, 친구도 사귈 수 있었고, 그 흔한 노래를 비로소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 이슈도 마찬가지다. 중증장애인들이 현재의 기준에 맟춰 노동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정말로 ‘중증장애인=기생적 존재’라는 낙인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하다못해 얼마나 장애인 개개인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지금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나서야 하는 투쟁은 다른 권리쟁취 투쟁에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이 시도해 왔던 것처럼 장애인 당사자 자신의 몸이 아니라, 현재의 노동을 둘러싼 관계망을 전면적으로 바꿔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 개념은 변한다. 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고 역사가 증명해주는 사실이다. 사회적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인간 욕구의 확장에 따라, 노동이 아닌 것이 노동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형태의 노동이 출현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그동안 장애인을 노동 바깥으로 내몰아 왔지만, 그러므로 세계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왔지만,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노동 양식, 즉 임금 노동이 결코 노동의 유일한 양식일리는 없다. 그리고 마침 자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자들과 자연에 대한 착취를 통해 연명하고 있는 현재의 노동 개념을 깨뜨려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전장연 노동권위원회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진보적 장애인 운동 차원에서 기존의 노동 환경, 특히 장애인들을 노동 바깥으로 내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임금 노동 체계 전반에 대한 저항의 실천들을 기획하고 조직하는 데 궁극적 목표를 두고 있다. 물론 노동권위원회가 논의한 사안은 전장연 사무총국과 중앙운영위원회 등의 승인을 거칠 때만이 전장연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 현재 장애 관련 이슈 전반에 주목하느라, 각 장애 관련 이슈들 하나하나에 주목할 수 없는 사무처에게 이 위원회는 장애인 노동과 관련된 여러 투쟁 의제들을 발굴하여 제시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실질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고민하며, 사회적으로 담론화해 가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설립된 지 약 반 년의 기간 동안, 노동권위원회는
1. 자본주의적 노동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노동 개념 확립을 위한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개념 정립, 더 나아가 권리중심 공공일자리의 안정화 및 확장 투쟁
2. 정립전자 불법사업 및 노동자 해고 규탄 투쟁
3. 공공기관 의무고용률 미준수 규탄 투쟁
4.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에 기반한, 그러므로 곧 비장애인을 노동 시장에서 배제하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을 넘어서기 위한 민주노총과의 고동 투쟁 전선 건설 등을 추진 등의 과업을 수행해 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위원회는 각종 기자회견을 꾸리고, 토론회 등을 개최 및 참가하는 한편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노동 운동 진영이 주목하고 있는 현안에도 적극 연대해 왔다.
#장비 회원들의 지지와 동참을 요청하며
노동권위원회를 꾸리고 가장 많이 들은 핀잔이 있다. 더 나은 복지 시스템을 마련하고 인권 의식을 사회적으로 더 확산시키면 되지, 왜 진보적 장애인 운동의 역량을 굳이 노동 문제에 투여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노동자인 조상지 동지가 이미 말한 바 있듯, 장애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동이라는 활동은 타인들과 함께 세계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이로써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활동이며, 따라서 자신과 사회를 하나하나 변화시켜 가는 활동이다. 여태껏 그 활동으로부터 배제되어 온 이들을 계속 ‘기생적 소비계층’으로 남겨두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그러한 세상을 과연 해방 세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러한 세상을 용인하는 것은 과연 전장연의 정신에 부합하는가?
장애인 노동권 투쟁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삶의 조건을 바꿔내는 동시에, 현재의 억압적 생산 양식 전반에 대한 변혁 운동이 될 것이다. 새로운 노동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이 사회 전체를 이동시키기 위해, 노동시장으로부터 제일 먼저 배제되어 온 장애인들이, 그리고 전장연의 모든 동지들이 ‘먼저’ 투쟁에 나서야 한다.